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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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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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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눈길은 푸른 하늘과 나무, 꽃에 오래 머물렀다.“ 무의미한 고통 대신 조용히 남은 날을 정리하겠다”는 그는 지난달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
'존엄사 인정' 그 후…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그저 남은 인생 고통없이 담담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의 눈빛은 고요하고 맑았다. 22일 고려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병동 앞. 야외 간이공원에서 만난 이모(61)씨는 "죽음을 아주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곧 "두렵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그가 중얼거린다. "하늘도, 바람도, 비도 참 좋네요." 표정이 참 평화롭다.
이씨는 품위 있게 '잘 죽는' 웰다잉(well-dying)의 길을 선택한 수많은 말기 환자 중 하나다. 아직 적지만, 매년 3000여명의 암환자가 호스피스에 의존해 세상을 떠나고 그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이씨는 한 달 전쯤 항암(抗癌) 치료를 중단했다. 항암 주사 처방처럼 병을 '고치는' 의료 행위를 일절 끊었다. 그는 지금 순간순간 덮치는 격한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치료만 받고 있다. 그는 "사는 것처럼 살다가 정리하고 싶었다"고 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가망 없는 싸움을 하느라 고통 속에서 남은 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는 건 무의미하지요.가족들한테도 그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결정이었다. 4년 전 직장암 2기 말 선고를 받은 이래 이씨는 방사선 치료·골반 수술 등 모든 일을 다 시도했다.
◆ "부담 없이 호스피스 이용할 수 있게 말기환자 지원을"
177㎝의 장신(長身)에 "청와대 경호실장감"이란 말을 들을 만큼 체력이 좋았던 이씨는 회복을 의심치 않았다.
폐에 암세포가 전이된 지난해 10월 이후에도 그는 항암 주사를 맞았다. 그때마다 먹은 것을 토하고, 탈진해 늘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큰딸(34)이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면 어떻겠냐고 에둘러 물어온 것이었다.
"처음엔 안 간다고 했어요. '다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왜 섞이냐'고…. 마음속에서 반발이 있었던 거지. 머리는 결과를 뻔히 아는데 마음이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날 밤, 그는 TV를 보다 심한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족을 보면서, 그는 '이제는 정리를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는 적극적인 치료를 중단한 자신의 선택을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스스로 '말기암 환자'라고 규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남은 시간을 순간순간 알차게, 소중하게 보내기 위해 '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그는 비관 속에서 하루를 소비하지 않는다. 병상을 지키는 아내와 대화도 많이 하고, 1남2녀 자녀와 더 값진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며 조용히 아름다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기력이 허락하는 동안엔 화창한 날씨와 선선한 바람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싶다.
"호스피스 병동이 실시하는 음악 수업도 들어봤다"고 말할 때, 흰 머리가 듬성듬성한 시한부 환자는 장난기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뭐 불렀느냐고요? '노란 손수건' 불렀지, 노오~란 손수~건."
◆삶의 질, 죽음의 질
품위 있고 인간답게 인생의 끝을 맞으려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터부시해왔다. 하지만 고령사회가 되면서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이 사회적 화두(話頭)가 됐다.
국립암센터가 지난해 성인 남녀 1006명에게 물어본 결과, 질병이 현재의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85%가 호스피스나 완화의료를 이용하겠다고 응답했다. 96%는 자기 질병이 말기 상태일 경우 의사나 가족이 이를 즉시 알려주길 원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 삶을 마무리할 시간을 갖고 싶다는 의미다. 윤영호 암센터 기획조정실장은 "말기 환자들은 편안한 환경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웠다'라는 말을 하면서 임종을 맞기 원한다"며 "이제는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말기 환자들이 삶을 편하게 마무리하는 호스피스 이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팀이 전이성 암 환자 298명을 사망 때까지 추적한 결과, 실제로 호스피스 상담을 의뢰한 환자는 9.1%에 불과했다. 편안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기간인 임종 직전 1개월 동안에도 대형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암 환자 비율은 33.6%로 미국(9.2%) 등 선진국에 비해 아주 높았다.
대부분의 병원이 연명 치료 거부 의사를 환자들에게 물어보지만, 그 이후 환자들의 생활이 호스피스로 연계되지 않고 있다. 한 해 6만5000여명의 암 환자가 죽음을 맞지만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경우는 6% 수준이다.
호스피스에 들어오는 시기도 임종이 임박한 경우가 많다. 국립암센터가 전국 23개 호스피스 기관을 조사한 결과, 호스피스 환자의 73%는 사망 한 달 이내에 완화의료 서비스를 받았다. 특히 죽기 1주일 전, 그저 임종을 하러 온 환자가 30%로 가장 많았다. 이 때문에 말기 환자들이 호스피스에 머무는 기간은 평균 17일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 성바오로병원 호스피스팀장 오선희 수녀는 "회생 불가능한 말기 환자가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고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국가가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호스피스(hospice)
라틴어 '손님(hospes)'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연명(延命) 의술을 하는 대신 환자가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여 평안하고 조용한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봉사 활동을 뜻한다.
고대구로병원에 입원중인 대장암말기환자 이 모씨(61)는 존엄사를 찬성한다고 밝혔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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