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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끊기는 현상은 과다 알코올 때문… 즉각 술 자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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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4-12-26
‘필름’끊기는 현상은 과다 알코올 때문… 즉각 술 자제해야
알코올은 ''기억 창고'' 해마 손상시키는 원인…
심해지면 "기억 보충하기 위해" 거짓말도 ''술술''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 역)는 범인의 흉기에 머리를 맞은 후 기억력이 소실되어 모든 사실을 딱 십 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첫 키스만 50번째’란 영화에서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루시(드루 배리모어 역)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전날 일어난 일을 잊어먹는다. 따라서 그녀를 사랑하는 헨리(아담 샌들러 역)는 매일같이 그녀에게 처음 접근하는 신사로서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 한편 영화 ‘마제스틱’에서는 물에 빠진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짐 캐리가 모처럼 점잖은 남자로 나온다.
이런 영화의 주인공들은 뇌 손상 후 성격이 변하거나, 말을 못하거나, 치매가 된 것도 아닌데 단지 기억력만 선택적으로 저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기억 형성은 주로 측두엽의 안쪽, 변연계의 일부인 해마가 담당한다. 따라서 위의 주인공들은 해마 부위만이 선택적으로 심각하게 손상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한편 해마를 일부러 손상시켜 기억상실증을 만드는 영화도 있다. ‘타임랩스’라는 영화에서는 이라크에 핵무기를 건네주려는 악당들이 기억이 사라지는 약을 사용하며, ‘페이첵’에서는 악당들이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렉 역)의 뇌세포(해마 조직일 것이다)를 파괴하여 특정한 기억을 없애려 한다.
실제로 임상에서 이처럼 다른 부분은 놔두고 해마 부위만 선택적으로, 심각하게 손상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아주 비슷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의 이름은 HM이다. 미국 코네티컷주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HM은 9살 때 자전거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고 이듬해부터 간질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간질 발작은 점점 심해졌는데 약을 복용해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당시 간질 수술이 의학계에 막 시도되고 있었는데 1953년에 그는 하트포드병원의 윌리엄 스코빌 박사에게 간질 수술을 받았다. 간질의 진원지는 양쪽 측두엽이었기 때문에 박사는 양쪽 측두엽을 모두 제거했다. 제거된 부분에는 편도체 그리고 해마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간질 증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간질 치료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뇌의 상당한 부분을 잘랐는데도 그의 성격, 태도, 사고 등은 수술 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당시로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수술이 끝난 후 HM은 자신이 몇 살인지,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심지어 자신의 부모가 돌아가신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기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서술기억(explicit memory)과 절차기억(implicit memory)이 있다. 서술기억은 어떤 상황이나 사실에 대한 기억이다. 예컨대 어제 친척이 방문했다는 사실, 혹은 오늘 아침 먹은 반찬을 기억하는 능력이다. 반면 절차기억은 반복적이며 장기적 학습을 통해 저절로 몸에 배게 되는 기억을 말한다. 예컨대 숟가락질, 젓가락질 하는 것,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기억이다. HM은 서술기억은 사라졌으나 절차기억은 저하되지 않았다.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할 줄 알았고 차도 몰고 다녔고 나름대로 사회생활의 예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서술기억 능력 상실은 심각했다. 예컨대 의사가 단어 세 개를 외우게 하고 이를 5분 후에 기억해 보라고 하면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의사가 그런 요구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러한 HM에 대한 연구 결과로 학자들은 인간의 기억 형성에 해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뇌의 질병에 의해 HM과 비슷한 증세를 갖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의한 뇌염은 양쪽 해마 부위를 잘 손상시키므로 이런 환자는 흔히 기억력 장애를 후유증으로 갖게 된다. 뇌졸중은 흔한 병이지만 다행히 해마나 편도체 같은 부위에는 잘 안 생긴다. 그러나 뇌졸중으로 기억 회로의 일부인 시상의 앞쪽이 손상되는 경우는 있으며 이럴 때 환자는 순식간에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젓가락질은 절차기억
알코올은 해마를 손상시키는 중요한 약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술을 많이 마시면 해마 부위가 심하게 손상되어 기억력이 떨어진다. 지독한 술꾼들은 어떤 일을 깜박깜박 잊을 뿐 아니라 거짓말도 잘 하는데, 이들의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없어진 기억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기억력이 없는 사람의 거짓말을 작화증(confabulation)이라 한다. 이와 같이 오랜 술 중독으로 기억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를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송년회가 한창인 요즘 술을 지독하게 마신 후 잠깐 동안 지속되는 기억 소실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술을 깨보니 분명 자신은 집에 와있고, 차는 주차장에 있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 들어간 기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처럼 과음에 의해 일정 기간의 기억이 소실되는 현상을 ‘블랙아웃(black out)’이라 부르는데 역시 알코올에 의한 해마의 손상으로 이해된다.
실험 동물에게 과도하게 술을 공급하면 동물의 공간 기억이 손상된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알려졌다. 예컨대 먹이를 찾으러 가는 방법을 한동안 연습 시킨 쥐에게 술을 먹이면 길을 찾는 데 장애를 나타낸다. 물론 해마의 손상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쥐에서는 알코올이 비공간적 학습에는 별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알코올은 뇌에서 알로프레그나놀론(allopregnalolone)이란 신경호르몬의 양을 늘리고, 이 호르몬이 GABA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함으로써 해마의 기능을 저하시킨다고 한다. GABA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이므로 이것이 항진되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안정된다. 이것이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의 하나이다. 한편 알로프레그나놀론은 스트레스를 주면 증가하는데 스트레스가 많은 상태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현상이 이로써 설명된다.
우리가 건네는 술은 상대방 뇌의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을 높여 긴장을 풀고 감정을 부드럽게 해 준다. 이런 점에서 한두 잔의 술은 우정의 표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술, 예컨대 폭탄주를 자꾸 권한다면 이는 상대방 뇌의 알로프레그나놀론 수치를 높여 해마를 손상시킴으로써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를 만드는 행위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현진건이 말하는 ‘술 권하는 사회’이므로 송년회 시즌에 더욱 이런 염려가 생긴다.
/김종성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 주간조선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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