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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지 않은 손님, 가을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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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3-10-15
초대받지 않은 손님, 가을 우울증
''건강.인간관계.돈.지력(智力)''.
기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4가지 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순서다. 앞쪽일수록 필수불가결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여기서 건강이 비단 몸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CNN 창업자인 미국의 언론재벌 테드 터너는 승부사의 기질을 지닌 타고난 사업가였다. 가난한 면화생산 농가에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한 뒤 옥외광고탑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순자산 48억달러의 대부호로 성장했다. 유엔에 10억달러나 기증했고 미녀영화배우인 제인 폰다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백35만 에이커나 되는 땅을 매입해 미국 내 최대 토지 소유자인 동시에 아메리카컵 요트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는 만능 운동선수다. 말 그대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인생을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년 전 제인 폰다와 이혼했으며 AOL과의 합병 이후 경영에서도 손을 뗀 상태다.
세계 언론의 황제이자 1991년 타임지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만큼 성공의 대명사로 손꼽히던 그가 왜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을까. 정답은 그의 지병인 조울병(躁鬱病)에 있다. 이 병은 기분이 한껏 고조되는 조증(mania)과 우울증(depression)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으로 우울증의 한 형태다. 사업가에게 조증은 때론 명약이 되기도 한다. 밤잠을 자지 않아도 기운이 나며 매사 즐겁기 때문이다. 무모하리만큼 공격적 투자도 손쉽게 이뤄진다. 1980년 누구나 망하리라고 예상했던 24시간 뉴스채널인 CNN도 이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조증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터너는 정신과 의사에게 처방받아 리튬이란 조증 치료제를 복용한 경험이 있다(리더스 다이제스트 1998년 10월호).
조증이 끝나고 우울증이 나타나면 사정은 완전히 반전된다. 매사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지며 슬픈 감정에 휩싸인다. 죽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세로토닌 등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떨어져 나타나는 뇌의 병이기 때문이다. 실직이나 실연.파산.사별 등은 하나의 악화인자일 뿐 근본원인은 아니다. 즉 우울증이 없다면 이러한 악화인자가 있어도 자살로 연결되진 않는다. 10명 중 1명은 평생 한번 이상 우울증에 걸리며 자살하는 사람의 8할은 우울증 때문이다.
최근 자살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제치고 사망원인 7위로 올라섰으며 인구 10만명 당 사망자 숫자(사망률)에서도 1992년 9.7명에서 2002년 19.1명으로 두 배나 늘었다. 여기엔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도 있지만 정몽헌 회장처럼 재벌도 있었다. 저마다 사연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울증이 이들의 중요한 자살원인이었으리란 것이다. 우울증은 생물학적 질환인 만큼 유전력이 있다. 자살의 집안 내력이 있다면 후손들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테드 터너의 아버지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바 있다. 정몽헌 회장도 그의 형인 몽우씨가 90년 자살한 사례가 있다.
가을은 일조량의 급감으로 뇌속에서 멜라토닌 호르몬의 분비가 저하되면서 우울증이 증가하는 계절이다.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낙엽을 밟는 낭만이나 감상은 대환영이다. 그러나 우울증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주의가 필요하다. 행여 죽고 싶다는 말을 듣거나 아끼던 물건들을 주위 사람에게 나눠준다면, 그리고 말수가 줄어들고, 바깥활동을 일절 삼간다면 이는 우울증 경보다. 현행 형법에도 자살 방조죄가 있다.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의 처벌이 가해진다. 가족이 자신에게 자살 징후를 보였는데 방치한다면 의학적으로 자살 방조나 다름없다. 다행히 프로작과 졸로푸트 등 해피메이커라 부르는 약물은 우울증을 매우 효과적으로 치료한다. 약을 먹으면 행복해지고 자살 충동이 줄어든다. 주위에 우울증 환자는 없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sther@joongang.co.kr>
( 중앙일보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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