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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의 희망>격리앞서 정부차원 `재활시스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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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4-03-19
<마이너리티의 희망>격리앞서 정부차원 `재활시스템`을
(::정신질환자들 ''음지에서 양지로''::) 정신병증을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다녀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정신질환 중에 가장 심각한 분열증 환 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정신분열증 환 자도 햇볕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우리 사회도 이제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걸어다니는 흉기? “우리 사회는 정신질환자를 폭발물처럼 여기지요. 흉악 사건만 나면 정신병자 소행이 아닌가 의심하잖아요. 미친 놈 입장에선 정말 미칠 노릇이지요.” ( 치료 중인 분열증환자) 우리 국민 10명 중 3명은 평생 살다가 한 번은 정신질환에 걸린 다. 보건복지부가 2002년 국립서울병원, 서울대병원 등에 의뢰해 조사한 통계결과다. 물론 이때의 정신질환은 우울·조울증뿐만 아니라 알코올·니코틴장애까지 포함한다.
정신분열증은 보통 1000명당 1명 꼴로 앓는다. 이 병의 양성환자 는 환각, 환청에 시달린다. 음성 환자는 의욕이 없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든다.
정부는 지난 95년 정신보건법 통과 이후로 정신질환자 재활 사업 을 활발히 펼쳐왔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자에게도 인권 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 은 분열증환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긴다. ‘걸어 다니는 흉기’를 방치하는 것은 안전하게 살 대다수 시민의 권???침해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일부 질환자가 벌인 범죄나 사건이 소문의 귀를 타고 불안스럽게 증폭된 결과다 . 이 때문에 분열증 환자는 일단 발병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다. 본인은 ‘미친 놈(년)’이라는 화인이 찍혀 신음해야 하고, 가족들도 ‘미친 놈이 나온 집안’이라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환자 치료보다는 격리에 신경쓰게 된다. 대부분의 환자가 장 기 입원을 하거나 외진 곳의 복지시설, 요양원, 기도원 등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는 까닭이다.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 “환자가 치瀟敾?꾸준히 복용만 하면 발작할 염려는 없습니다.
통계로 보더라도 정신분열증 환자는 스스로 위축돼 있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범죄·사고율이 낮아요.” 정신과 의사로 24년째 일하고 있는 권영탁(52) 박사는 분열증 환 자에 대한 사회 인식이 바뀌고 국가 차원의 재활 지원체계가 강 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박사는 지난 91년에 정신분열증을 극복한 사례 50가지를 담아 책을 펴냈고, 꾸준히 개정판을 내고 있다. 그의 환자들은 중소업체 사장, 대기업 이사, 회계사, 교수 등으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의사, 치과 개업의도 있다는 것이 권 박사의 전언이다.
“제가 맡은 여자환자 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사례가 57 건입니다. 환자가 임신을 하더라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치료약물을 신중히 조절하면 됩니다. 제 딸이 분열증에 걸리더라도 아이를 낳게 할 것입니다.” 권 박사처럼 분열증 환자에 대해 ‘적극적 치료’를 시도하는 의 사는 많지 않다. 만에 하나라도 태아가 잘못되면 모든 허물을 뒤 집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환자들은 분열증세의 단계에 따라 치료 약물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았다고 판단해 치료약을 끊 는 경우 100% 재발하니까요.” 지난 2000년에 정신과 의사 16명이 함께 펴낸 책 ‘정신과 의사 들의 정신병 이야기’도 분열증 환자의 정상적인 생활과 약물치 료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엔 3박자의 전제 조건이 있 다. 평생 치료약을 먹겠다는 환자 본인의 의지와 담당 의사의 끊 임없는 관심, 그리고 가족과 사회의 따뜻한 배려.
“제게도 꿈이 있습니다” 충남 D시에서 모텔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박정남(37·가명)씨.
지난 90년 분열증 발병 이후로 6번을 입원해야 했을 정도로 재 발에 시달렸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덤비던 7일 오후, D시의 바닷가 카페에서 박씨를 만났다.
“지난 99년 이후로 재발하지 않았어요. 의사 지시대로 치료약을 한 번도 빼지 않고 먹었기 때문이지요.” 14년 전 그가 발병했을 때, 스무 살에 만나 결혼했던 아내는 그 를 미련없이 떠나갔다. 이후 그의 뒷바라지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두 살 터울의 형과 막내 동생이 맡아야 했다. 박씨는 재발할 때 마다 경찰에 의해 손목이 묶여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퇴원한 후 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 형제가 준 돈이 다 떨어지면 서울 곳곳에서 노숙으로 전전했다.
그의 형과 동생은 뒷바라지에 지쳐 ‘포기하는 심정’으로 지난 99년 D시 인근에서 비인가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안모 목사에게 그를 맡겼다. 형제들은 매사에 의존적인 그를 직접 만나는 일을 삼갔다. 대신 후원금 명목으로 다달이 30만원을 부치며 안 목사 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해 그의 상태를 점검했다.
“목사님의 보살핌을 받는 한편 D시에서 한 정신과 의사를 만난 것이 제가 갱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젊은 의사는 제 고 민을 다 들어주고, 때로 충고도 하며, 제가 일상생활을 하며 치 료약을 챙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세세히 알려줬지요.” 박씨는 의사의 지시대로 치료약을 꾸준히 복용하며, 주변 농가의 일을 도와줬다. 약 때문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상태가 지속됐 지만 이를 악물고 먹으니 서서히 적응이 됐다. 그렇게 ‘사회생 활 연습’을 마친 후 인근 호텔의 안내인으로 취직해 월급을 만 져보는 감격을 맛보게 됐다. 몇 달 전 현재의 모텔 지배인으로 직장을 옮겼다.“청소 아줌마 등 모텔 직원들이 혼자 사는 저를 얼 마나 살갑게 대해주는지 몰라요. 정신이 혼미한 채 노숙하던 시 절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지요. 지난 설에 서울 에 올라가 형과 동생의 가족들을 만났어요. 조카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데 속으로 눈물이 나 더군요.” 그는 정상적으로 생활하게 되면서 그 동안 형과 동생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자주 생각한다고 했다. 일찍 아내를 잃고 홀로 살다 가 그가 발병한 직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을 언 급하며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를 뒷바라지한 형제와 안 목사님,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보답하려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아야 하지요. 그렇게 하려면 제가 이 약을 보약처럼 꾸준히 먹어야 해요.” 그는 애써 밝은 얼굴을 하고,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보여주 며 서그럽게 웃었다.
“착실히 돈을 모아 50대 중반쯤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복 지시설을 운영할 작정입니다. 언감생심 허황한 꿈일 수 있겠지만 , 꼭 이루고 싶어요. 밑바닥 사정은 밑바닥 생활을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거든요.” 박씨의 소망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느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정신질환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단순히 뇌가 아파서 생기는 몸의 병이라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잦아들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 문화일보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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