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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한국인의 집단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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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4-04-05
나약한 한국인의 집단자살
▲ 하규섭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근래 잇따른 청소년 자살은 기성세대의 마음을 애처롭게 만든다. 인터넷을 통한 집단 자살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자살이란 본래 여러 원인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에 한두 원인만을 분석해내기는 힘들다.
자살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에 의하면 자살에는 이타적, 이기적, 아노미적 자살이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혼재해 있다. 사회적으로는 무규범이 판을 친다. 실업, 실직, 카드빚으로 인한 파산 등이 너무나도 많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과의 정서적 유대의 단절에 기인한 고독, 소외, 삶의 무의미함의 무게가 너무도 크다. 사회적인 무질서에서 유발된 스트레스에 개개인의 나약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강건해질 수 있는 기회가 희박하다. 한국 교육과정은 우선 너무 많고, 너무 어렵다. 성취와 희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위한 교육이다. 시험 성적과 학벌이 그 사람의 인격을 지칭하고 성적 하향은 열등감, 모멸감으로 몰아가는 살벌한 경쟁 사회다. 자살 충동은 그저 죽겠다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동시에 살고 싶다는 삶의 욕망이 빚어내는 강한 갈등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자아(自我)의 강건성에서 나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아의 강건성이 한국인에게는 점차 희박해져가는 것 같다. 교육은 강건한 사람보다는 너무나도 약한 사람만을 배출해낸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만 공부가 어렵고 문제가 어려워도 혼자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답안지를 먼저 뒤지고, 과외공부를 찾는다.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성적 지상주의로 인한 암기 위주의 교육 환경에서는 강인한 정신이 길러질 수가 없다.
어떤 정신 분석의(醫)의 말처럼 정신적 강건함은 적절한 좌절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좌절 및 스트레스를 나쁜 것, 있으면 안 될 것으로 간주하고 애초에 회피해버린다. 스스로의 힘으로 좌절, 스트레스,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을 사이버 세계의 ‘리셋(Reset) 증후군’에서 볼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 잘 되지 않아 답답하면 주저할 것 없이 바로 리셋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게 다시 시작된다. 지금까지 잘 안 되던, 머리 복잡한 상황은 그냥 간단히 포기해버리면 된다. 주인공들의 운명은? 걱정할 것 없다.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성장해온 아이들이 한국의 냉정한 경쟁체제, 강자와 일류만이 중심이 되는 사회, 한번 약자가 되면 계속 약자일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학벌 위주의 고용 체계에 맞닥뜨릴 때 무너져내리고 자살을 선택한다. 이렇게 나약한 사람들끼리 고민을 나누다가 자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하는 것이 집단자살이 아닌가 싶다. 혼자서는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용기도 없는 셈이다. 집단 최면상태의 힘을 빌려야 비로소 나도 자살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집단 자살이나 청소년 자살을 막으려면 정서적으로 강건한 사람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한국 사회가 노력을 해야 한다. 또 단 한 명이라도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최후의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허심탄회하게 언제나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가 되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규섭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 조선일보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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