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황세희.신인섭]
28세인 김철호(가명)씨는 남의 시선과 마주치는 일이 벅차다. 낯선 사람이면 더 힘들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공포감이 생긴다”는 게 그의 고민이다. 그는 “상대방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 같다”고 말한다. 자연히 외출을 꺼리고, 어쩌다 밖에 나가더라도 매 순간 남의 시선을 피하느라 괴롭다.
철호 씨는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부모는 아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지나쳐 모든 일을 간섭하고 통제했다. 수줍은 소년은 부모님의 말에 순응하며 잘 자라는 듯 보였다. 청소년기도 무난하게 모범생 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문제는 대학교에 진학한 뒤 차츰 학업뿐 아니라 남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상황을 피하다 보니 대인 관계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지금으로선 직장생활은 꿈도 못 꾼다.
철호 씨도 내심 남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막상 사람을 대하면 시선을 피하게 돼 답답할 뿐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김재진 교수를 찾았다.
남 의식하는 사회공포증…'상황' 설정해 치료
철호 씨와 면담을 하고, 기본적인 심리검사를 한 김 교수는 '사회공포증' 진단을 내렸다. 치료에 앞서 김 교수는 질병의 특성부터 이해시켰다.
“치료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선 인지행동 치료를 받아야 해요. 처음엔 철호 씨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두려움에 노출시킨 뒤 이를 이겨내면 좀 더 힘든 상황에 도전해 보는 식입니다.”(김 교수)
“제가 할 수 있을까요?”(철호 씨)
“물론 한 번에 되는 것은 아니며, 단계별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일단은 불안을 유발하는 사람과 직면하는 상황을 가상현실 속에서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경험해 보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철호 씨의 생각 중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를 저와 함께 찾고 교정해 나가야 합니다. ”(김 교수)
김 교수의 설명을 들은 철호 씨는 “한 번 열심히 치료받아 보겠다”며 다음 치료 날짜를 정한 뒤 귀가했다.
철호 씨에게 '남의 시선을 두려워 하지말고 직시하라'는 식의 주문은 실현성이 없다.
눈 똑바로 쳐다보는 아바타와 100분 대화
치료 과정은 모두 10회다. 기자는 철호 씨가 가상현실 치료 클리닉에서 네 번째 치료를 받는 과정을 정신보건 전문요원인 이지현 사회사업사·김 교수 등과 함께 지켜봤다.
치료 시작 전에 사회사업사가 지난 번 아바타와 실시한 대화 훈련을 현실에서 시도해 봤는지 점검했다.
“지난 1주간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시선을 먼저 보도록 노력해 봤나요?”
“네, 아직 편하진 않지만 이전보다는 시선에 대한 부담이 덜해졌어요.”(철호 씨)
“어떤 점에서요?”
“의식적으로 남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노력하자 시선에 신경이 덜 쓰였어요. 덜 예민해졌다고 할까요?”(철호 씨)
“아바타와 현실 간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아바타는 진짜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바타와 대화 도중 힘들게 느껴질 때 '현실이 아니다'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더 편해져요.”(철호 씨)
기본적인 대화가 끝나자 치료를 시작했다. 철호 씨가 이마에 기계를 장착하고 3차원 영상을 보면서 아바타와 대화를 시도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아바타)
“무슨 동네에 사세요.”(아바타)
“○○동이요.”(철호 씨)
이런 식으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아바타와 철호 씨는 100분간 대화를 이어갔다.
네 번째 치료가 끝나자 이지현 사회사업사는 철호 씨에게 “오늘 훈련한 내용을 외출하면서 마주치는 사람과 훈련해 보고 결과를 말해 달라”는 숙제를 내줬다.
김 교수는 치료실을 나서는 철호 씨의 표정이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자신감에 차 있으며, 10회를 마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들려줬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가상현실 인지 치료는
3차원 화면·음향 … 공포증·알코올중독 치료에 사용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말 그대로 실제 상황은 아니다. 컴퓨터를 이용해 실제 상황을 모방한 상황이다. 가상현실 인지치료란 이 상황에서 환자가 현실 세계, 일상생활에서 문제점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훈련하는 방법이다.
환자가 실제 상황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 시뮬레이션 된 화면이 3차원적으로 제공되며, 음향도 입체 음향을 사용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델(아바타)이 최대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 환자는 머리에 특수한 디스플레이 같은 장치를 착용한다. 이를 통해 촉감·냄새·음성 인식 등을 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는 광장공포 혹은 고소공포와 같은 공포증의 행동치료에 이용된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사회공포증 환자, 단주 훈련이 필요한 알코올 중독자, 사회 적응 훈련이 필요한 정신분열병 환자 등이다
사회공포증 치료는 불안이 유발돼 회피하게 되는 상황을 설정한 뒤 왜곡된 생각을 발견하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찾도록 수정하는 훈련을 받는다. 매주 두 번씩 한번에 90~120분간 총 10회에 걸쳐 실시된다.
알코올 중독자가 받는 음주 거절 훈련은 네 번의 치료 과정을 거친다. 술을 다시 찾는 요인 찾기→음주에 대한 갈망 대처→음주가 권장되는 자리에서 거절하는 법→술 권하는 분위기에서 적절하게 대처하는 법 등을 배운다.
국내에서는 2003년 과학재단의 연구비로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이 개발됐고 2006년, 강남세브란스병원에 가상현실클리닉이 개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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