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황세희.김태성]
40세 때 고혈압, 48세 땐 당뇨병 진단을 받았던 이영득(55·가명)씨. 하지만 치료를 소홀히 한 채 매일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친구 삼아 지냈다. 급기야 오른쪽 팔·다리 근력이 약해져 병원을 찾았다. 뇌단층촬영 결과, 뇌에 작은 뇌경색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됐다.
담당 의사는 “금연·금주 하며 고혈압과 당뇨병을 적극 치료받지 않으면 치매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이씨는 “업무상”을 핑계로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
이씨는 4년 뒤인 54세부터 약속을 잊거나 중요한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 가족에 이끌려 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진단은 반복된 뇌졸중에 의한 '혈관성 치매'였다.
65세 이상 42만 명 치매 … 한해 의료비 3800억
오늘(21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치매의 날'이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날로 증가하는 치매에 적극 대처하자는 취지다. 우리나라도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 환자는 8.4%(42만 명)며 치매로 가는 길목인 경도인지장애도 인구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치매 환자를 위해 국민이 지불하는 의료비는 2001년 344억원에서 2008년 3817억원으로 무려 10배 이상 늘었다. 요양비와 가정에서 관리하는 비용을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수치가 된다.
문제는 치매가 이렇게 '사회적 고부담 질병'이 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식은 낮다는 것이다. 이씨의 경우처럼 당뇨병과 고혈압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해 치매로 진행된 안타까운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당뇨병·고혈압 관리, 조기 발견하면 예방 가능
치매의 원인은 50여 가지나 된다. 전체 환자의 10~15%는 외상이나 종양·알코올 등에 의해 치매가 발생한다.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같은 혈관질환도 전체 치매 원인의 20~30%나 된다. 우울증도 치매 증상을 보인다. 알츠하이머가 아닌 이들 치매는 정확한 진단 뒤에 조기 치료를 받으면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온다. 치매의 50% 정도는 예방 또는 치료가 가능한 셈이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이동영 교수는 “중년기부터 당뇨병·고혈압·고지혈증·심장병 등 뇌혈관을 손상시킬 위험 요인을 적극 관리하면 혈관성 치매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머지 알츠하이머 치매도 조기 발견해서 약물 치료를 하면 병의 진행을 지연시킬 수 있다.
요즘 '경도인지장애'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경도인지장애는 정상과 치매의 중간단계, 즉 치매의 전단계다. '뇌기능 관리'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뇌의 사고 기능을 방해하는 질환과 상태를 미리 조절하고, 초기부터 치료함으로써 보다 나은 사고 기능을 갖고 여생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최근 일 자주 깜빡하면 치매 전 단계일 수도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은 경도인지장애 환자 270명을 10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매년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10〜15%가 치매로 진전돼 6년 동안 80%가 중등도 환자가 됐다. 치매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선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의료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경도인지장애의 주요 증상은 기억력 장애. 을지대병원 신경과 윤수진 교수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 흔히 '건망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며 “이때 기억력 장애의 특징은 옛날 일은 잘 기억하는 데 반해 최근의 일은 깜박한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사소한 일을 잊지만 차츰 빈도가 잦아지다가 중요한 일을 놓치고 만다.
경도인지장애가 건망증과 다른점은 동년배 보다 기억장애가 심각하고 작년보다 올해에 눈에 띄게 나빠졌으며 기억장애 정도가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나덕렬 교수는 “치매 중 가장 예후가 나쁜 알츠하이머병도 경도인지장애가 나타날 때부터 관리하면 치매로 진행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 증상 악화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경도인지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선 약물을 쓰면서 뇌를 자극하는 일을 생활화해야 한다. 첫째 수칙은 고혈압·당뇨병·고질혈증 등 뇌혈관 손상을 촉진하는 질병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 운동도 생활화하고, 식사는 채소·과일·저지방식 위주로 섭취한다. 또 읽기·쓰기·게임·정원 가꾸기 등 정신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동아리나 모임에 참가하는 등 사회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65세 이후엔 증상이 없는 듯해도 매년 치매 검진을 정례화해야 한다. 또 중년에 발병하는 조기 치매도 증상을 간과하지 말고 즉시 병원을 찾아 치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김태성 기자
[중앙일보 박태균] 지난해 3월 치매 초기 판정을 받은 김모(72·충남 논산) 할머니. 집안 살림이나 농사일은 별 문제 없었지만 숫자 계산이 잘 안 되고, 날짜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등 치매 의심 증상을 보였다. 뇌단층촬영 결과 뇌가 약간 위축돼 있었고, 언어기능·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의사는 약물 치료를 권했다. 다행히 김 할머니는 약물 치료 뒤 치매 증상이 더 이상 악화하지 않았다. 깜박깜박하던 증상도 줄었고, 가족 외엔 치매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혈관성 치매 초기 땐 치료 가능
치료 가능한 치매인지 여부는 혈액 검사·뇌 촬영 등으로 진단한다. 이런 치매는 원인 질환을 치료하면 함께 사라진다.
뇌의 퇴행질환인 알츠하이머병은 전체 치매의 50%를 차지한다. 뇌조직을 유지하는 타우라는 단백질이 망가져 한 번 발병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혈관성 치매는 산소와 영양 공급이 중단되면서 뇌세포가 죽는 것이다. 같은 치매지만 진행하는 과정과 증상은 다르다. 알츠하이머병은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됐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찾아오지만 혈관성 치매는 갑자기 증상이 나타나거나 악화돼 추정이 가능하다. 또 초기라면 치료도 가능하다.
적포도주·등푸른생선 즐기면 치매 위험 40% ↓
치매 예방을 위한 식사요법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지중해식 식사다. 최근 국제알츠하이머병 콘퍼런스에선 지중해식 식사가 치매 발생 위험을 40% 이상 낮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건국대병원 신경과 한설희 교수는 “적포도주와 등 푸른 생선을 즐겨 먹는 것이 지중해식 식사의 핵심”이며 “두 식품엔 세포 노화의 주범인 유해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치매 예방용 식품 성분으로 서양에서 한때 큰 기대를 모았던 것은 은행잎 추출물이다. 그러나 6년간 미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연구(GEM 연구)에서 치매 예방 효과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에선 아직 은행잎 추출물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고 있다. 가벼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가 진행 중이다.
알츠하이머병 약은 병 진행 속도 늦춰
알츠하이머병 치료에 가장 널리 사용하는 약은 아세틸콜린(신경전달물질) 분해효소 억제 약이다. 뇌에서 아세틸콜린의 분비가 줄어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서다.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승현 교수는 “이 약은 체내 아세틸콜린 농도를 증가시켜 치매 환자의 인지기능을 향상시킨다”며 “병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지만 6개월〜2년가량 지연시킬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약은 치매 초기·중기에 써야 효과적이다.
흥분성 신경전달물질(글루타메이트)이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을 막아 뇌의 학습·기억능력을 높여주는 약도 등장했다. NMDA 수용체 길항약이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스타틴 계열 약의 치매 예방 효과도 기대된다. 비만·고지혈증을 20년 이상 보유한 사람의 치매 발생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스타틴 제제가 고지혈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약이라는 이유에서다.
수공예·독서·놀이로 꾸준히 뇌 자극해야
한양대병원 뇌건강클리닉은 서울 성동구 치매지원센터와 함께 인지 치료를 실시, 치매 예방·지연에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여기엔 다양한 수공예, 간단한 물건 만들기, 원예·독서·그림 그리기 등 작업요법, 음악감상·노래 부르기 등 음악요법이 활용된다. 또 치매 노인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해서 기억의 경로를 자극하는 회상요법도 적용했다.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과 정인과 교수는 “뇌세포를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활동을 하면 뇌세포가 위축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머리를 많이 쓰면 신경세포가 가지를 뻗어 상호 연결이 활발해지고, 쓰지 않는 뇌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고 말했다.
치매를 예방하려면 고독·고립을 즐겨선 안 된다. 종교·친목·동창 모임 등에 적극 참가해 대화 빈도를 늘려야 한다. 자원봉사·집안일 등 소일거리를 찾아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당발이 치매 예방약'이란 말은 이래서 나왔다. 장기·바둑·화투 등도 치매 예방에 유익하지만 무리한 내기는 오히려 촉발 요인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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