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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의 삶과 죽음 - 빈센트 반 고흐와 조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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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4-07-09
한 예술가의 삶과 죽음 - 빈센트 반 고흐와 조울병 윤보현 과장 현재 국립나주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장으로 전공은 기분장애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자신의 생애동안에 특이한 성격과 극도의 불안정한 기분 상태를 보였으며, 불운하고도 특별한 삶의 마지막 2년 동안은 정신병의 잦은 재발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37세의 나이로 끝내 자살하게 된다. 그의 사후에 150명 이상의 의사들이 제한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의 질병에 대해 황당할 정도로 다양한 진단명을 내 놓았다. 현재까지 일치된 의견으로 두 가지 진단명이 가능하다. 첫째로는 압생뜨(absinthe: 프랑스에서 당시에 유행하였던 독한 술로서 간질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는 사용되고 있지 않음)에 의해서 유발된 측두엽 간질이며, 다른 하나는 조울병(양극성 장애)이다. 그가 간질로 인한 정신과적인 문제들이 드러나기 이전에 이미 두 차례의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우울증에서 회복된 이후 조증상태로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극적인 반 고흐의 생애를 조망함으로써 조울병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반 고흐의 생애와 정신의학적 고찰 반 고흐는 네델란드인으로, 그의 조상들에서 정신병에 대한 기록은 없다. 어머니는 31세에 결혼하였는데, 첫 아들을 사산한 1년 후에 반 고흐를 출산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변덕스러우며 고집이 세고 골칫덩어리였다고 한다. 사춘기 때 사진과 나중에 그린 그의 자화상을 보면, 두상의 좌우대칭이 심하게 비대칭인데, 이는 출산 당시에 두뇌의 손상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뇌의 손상으로 인해서 어린 시절의 성격적 특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울병은 아동기에서도 발병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전형적인 임상 증상에 선행하여 행동적인 변화가 많은게 특징이다. 반 고흐에게는 5명의 남매가 있었는데, 3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이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는 남동생 테오(Theo)이다. 테오의 형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평생 동안의 조력으로 인해 반 고흐의 예술 세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테오는 형이 자살한 지 6개월 뒤에 병으로 죽는다. 다른 남동생은 군에 입대하였는데 자살을 하였는지 혹은 전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생전의 반 고흐는 막내 여동생인 빌헬미나(Wilhelmina)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녀는 35세경에 정신요양원에 수용되었으며, 반 고흐가 죽은 뒤에 정신분열병으로 판명되어 요양원에서 평생동안 치료받다 79세에 사망하였다. 반 고흐의 어머니는 남편과 세 아들보다 더 오래 87세까지 살았다. 그녀의 아들들은 30대에 죽었으며, 그녀의 딸들은 70대까지 살았다. 환자 가족의 정신병력은 환자를 보다 많이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조울병의 경우에는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비율이 다른 정신질환보다는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동생의 정신분열병에 대한 병력으로 인해 반 고흐의 정신과적인 진단명이 정신분열병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16세에 반 고흐는 헤이그에 있는 삼촌이 경영하는 미술상의 도제로 4년간 일한 후, 런던으로 파견되었다. 런던에서 지내는 2년 동안, 그는 첫 연애에서 실패한 후에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여러 달 동안 그는 우울했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가족과도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사고방식이 갑자기 종교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점차로 종교에 몰입하게 되면서 일을 소홀하게 되고 결국은 직장에서 쫓겨난다. 반 고흐는 이로부터 4년동안 전도사로 일하게 되는데, 전도사로서 공식적인 자격은 얻는 데는 실패하고 벨기에의 극빈 광부촌에서 복음전도사로서 열정적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나눠주는 극단적인 자선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은 상급자들에게는 교회의 권위에 걸맞지 않는 행동으로 비춰지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라는 명령을 거절한 것 때문에 교회에서 추방된 후에 그는 다시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후 그는 종교적인 믿음을 버리고 사회주의적인 이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 당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 한가지 나의 불안은 내가 이 세상에서 유용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많은 수의 조울병 환자는 10대에서 첫 발병으로 우울증이 오게 되며, 이후에 조증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반 고흐 역시 전형적인 조울병의 임상 경과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27세에 그는 사람들을 위한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그는 파리에서 미술상을 하는 테오의 변함없는 경제적인 도움과 격려를 바탕으로 예술가로서의 활동에 엄청난 에너지를 투자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생애 두 번째로 열정적이고 불운한 연애사건에 빠져들게 되는데, 상대는 남편과 사별한 그의 사촌이었는데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맹목적으로 집착하다 결국에서 상처를 받는다. 이후 그는 가족을 멀리하고 창녀와 1년간 동거하는데, 테오는 이때 형에게 아버지가 그를 요양원에 넣어 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반 고흐는 집에 돌아와 지내면서 그의 아버지와 자주 격렬하게 다투곤 하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의 반 고흐는 두차례의 우울증과 조증 상태를 경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심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극심한 우울감과 함께 사회적인 고립, 자기 혐오 및 부정적인 사고가 특징이며, 조증의 상태에서는 핑크빛 기분과 함께 증가된 정신적 에너지, 그리고 다양한 활동, 예를 들면 무분별한 연애에 빠진다거나 지나친 성행위에 몰입하는 등 행동의 절제가 어려운 편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후에 그는 화가로서 6년간의 네델란드와 벨기에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서 2년간 테오와 같이 지내게 된다(1886-1888). 이곳에서 그는 폴 고갱을 포함한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였으며, 인상파 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간질 증세를 경험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화가들이 즐겨 마셨던 압생뜨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측두엽 간질로 인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급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불미스런 행동을 하게 되어 대부분의 장소에서 그는 기피인물로 취급받았으며, 심지어는 테오와도 밤을 세워 다투곤 하였다. 이때부터 형에 대해 항상 동정적이었던 테오는 점차로 그가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테오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형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처럼 보여. 한 사람은 뛰어난 재능에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이기적이고 거친 성격을 가진 사람인데, 두 사람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서로 다른 말과 행동을 하거든. 형은 형 스스로가 자신의 적이라는 것 때문에 너무 불쌍해, 왜냐하면 그는 타인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힘들게 만들거든..."라고 쓰고 있다. 측두엽 간질의 전형적인 정신과적 증세를 인격의 심각한 변화이다. 극심한 분노감정을 포함한 기분의 변덕, 행동의 다양한 변화, 그리고 성적인 행동이 지나치게 감소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88년 초에 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의 아를르(Arles)로 옮기게 된다. 이 무렵 그는 비록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화가로서 그의 자질은 상당한 수준으로 완성단계에 있었으며, 이전보다 더욱 작품 활동에 매달리게 된다. 1888년 말부터 그는 정신병의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불쾌한 기분에서 황홀감으로의 변화가 매우 심하였으며 잦는 분노발작이 나타났다. 그의 작품 활동도 역시 매우 열정적으로 몰입하다가 금새 게으르고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테오의 설득으로 1888년 가을에 고갱이 반 고흐를 찾아오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잘 지냈으나 점차로 다툼이 심해지게 되었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논쟁은 때로는 너무나 지나쳐서 전기가 부딪히는 것과 같다. 마치 방전된 배터리의 상태와 같이 머리 속이 빈 상태로 멍해질 때 까지 싸우게 된다." 고갱과의 관계는 2달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갱이 떠난다고 얘기를 하자 그는 압생뜨 잔을 고갱에게 던져 버린다. 다음날 고갱이 떠나자 그는 면도칼을 가지고 뒤따라가서 얘기해 보지만 거절당하자,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잘라버린다. 이때의 반 고흐는 급성 정신병 상태로서 초조, 환각, 망상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경찰에 의해서 입원하게 된다. 그의 주치의인 펠릭스 레이(Felix Rey)는 반 고흐의 병을 간질로 진단하고 포타시움 브로마이드라는 약물을 처방하였다. 며칠 내로 그는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입원 3주 경부터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신병 발작으로 2차례의 단기 입원을 하였으며, 젊은 얘들에게 공개적으로 망신 당한 후에 다시 발작하여 4번째 입원을 하였는데, 1889년 5월에 그는 상 레미(Saint Remy)에 있는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하게 된다. 입원해 있는 동안 3차례의 정신병 발작을 보였으며, 1890년의 발작은 너무나 심해서 2월에서 4월까지 지속되었다. 상 레미에 있는 동안 그는 3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에도 반 고흐는 압생뜨를 지속적으로 마시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는데, 당시에는 그의 간질발작과 정신병의 증상이 술로 인해서 악화되는 것으로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테오는 1888년에 약혼하여 4개월 뒤에 결혼하였으며, 1890년에 아버지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반 고흐의 증상 악화와 일치한다. 반 고흐는 테오와의 관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이로 인해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다. 요양원에 있는 동안 그는 테오에게 자살에 대한 협박을 하였으며, 실제로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를 하였다. 1890년 5월 의사로부터 회복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그는 파리의 북쪽에 위치한 오베르(Auvers)로 옮겨와서 그의 마지막 인생의 10주를 이곳에서 살게 된다. 압생뜨를 끊은 후에 그는 간질병 발작과 정신병 증세가 멈췄다. 이 무렵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이 얻기 시작하고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가 건강을 잃어 가면서 반 고흐에 대한 경제적인 도움이 불투명해졌다. 형제간에 욕설이 오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스스로가 짐이 되어 감을 느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끊임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오베르에 있었던 70일 동안 40편의 유화과 30편의 스케치를 남겼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과거의 밝고 빛나던 색채 대신에 어둡고 우울한 톤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는 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쓰고 있다. 여인숙 주인에게서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상복부를 쏜 후 이틀 뒤에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게 된다.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신장 질환으로 그 역시 형의 뒤를 따르게 된다. 맺는 말 반 고흐의 병은 20세기의 의사들이 30가지 이상의 다양한 정신과 진단명을 붙일 정도로 복잡하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 2년동안 그를 괴롭혔던 측두엽 간질의 정신 증상과는 무관하게 조울병 증상이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천재 예술가의 불행한 삶에 한없는 동정을 보내면서 동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은 조울병(양극성 장애) 환자의 삶이 이렇듯 슬프게 흘러갈 것이라는 예측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픈 이웃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건강을 재확인 할 수 있듯이, 마음이 아픈 이들이 이웃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정신질환자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올바른 치유의 길을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 중앙일보 헬스케어 기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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