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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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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07-09-12
“환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요?”
조선일보 기사인용
[의사들이 쓰는 병원이야기] <15> 임상 시험 돕던 가짜환자의 질문 말기암환자 역할 도우미 실감연기로 의대생 울려 학생 영점처리 하려니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초년의사 시절 떠올라
“선생님, 저는 곧 죽는 걸로 되어 있거든요. 자꾸 나을 수 있다고 우기시면 제 입장이 곤란합니다.”
의대 4학년 학생들에게 임상 실기 시험을 진행 중이다. 나는 말기 암을 통보하는 의사의 태도를 평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장감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자 가상환자들을 투입해 시험을 치렀다. 가상환자란 특정 질병의 증세가 있다고 말하도록 훈련된 도우미들이다. 시나리오에 맞추어 몇 달간 리허설을 해 둔 상태였다. 40대 중반의 가정주부 ‘전말자’씨. 내 방에 배정된 가상환자다.
변에 피가 섞여 나와 검사를 받고, 오늘 말기 직장암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통보 받는다. 이런 경우 환자는 처음에는 결과를 완강히 부인하게 된다. 환자의 시나리오에 “선생님, 지금 보시는 것이 내 차트가 맞습니까?” 하는 대사를 넣어 두었다. 만약 학생이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짓게 되면 감점이다. 사형선고 통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 학생부터 상황이 꼬였다. “예, 환자분 차트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직장암은 간에 전이가 있어도 수술로 완치될 수 있거든요. 절대 포기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뿔싸, 맞는 이야기다. 최근에는 그 정도로 의술이 향상되었다고 강의했던 기억이 났다. 한정된 시간에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제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가상환자의 표정에 초조한 기운이 역력하다. 급기야 환자는 자기는 곧 죽어야 될 운명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부정의 단계를 거치면 말기 암 통보를 받은 환자는 분노의 단계로 간다. 삶을 졸지에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가상환자는 탁월한 연기력을 과시하였다. “선생님, 저, 정말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택시 한 번 탄 적 없어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 친구한테 빌려 주었더니 외제차 몰면서 흥청망청 쓰더라고요. 그런 년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친정아버지 직장암으로 돌아가실 때 입원비도 한번 못 내 드렸거든요.”
▲ 허원주 동아대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연기에 몰입한 환자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이쯤에서 ‘의사’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적당하다. ‘학생 의사’에게 눈을 돌렸다. 이럴 수가. 두 눈엔 벌써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그래요, 저희 어머니도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완전히 빵점이다. 환자의 마음을 어느 선에서 위로한 뒤 향후 치료 방침에 대한 조언을 해 줘야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이 나간 뒤 가상환자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주머니, 연기가 너무 지나치면 적절한 평가를 할 수 없거든요.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이라” “죄송합니다. 주책없이 오버를 해가지고. 참, 교수님은 환자 땜에 우신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연기인 줄 알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던 학생과 엄격한 잣대만 들이대는 교수가 사뭇 달라 보였다는 말이다. 문득 지난 세월 건조한 가슴으로 치료했던 말기 암 환자들이 떠올랐다. 그래, 환자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간호사 몰래 돌아서서 흰 가운의 소매 끝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던 젊은 암 전문의의 모습이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방금 울었던 학생의 평가를 약간 고쳐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원주 동아대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 ]
인공호흡기 거부… “편안히 죽게 해주세요”
[의사들이 쓰는 병원이야기] <14> 한센병 환자의 임종 대부분 보호자 없는 그들… 당사자가 모든 것 결정 보호자 편의 위주의 진료 다시 돌아보는 계기 돼
환자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폐렴이 진행되어 패혈증(혈액에 세균 감염이 생겨 신체에 이상이 생긴 상태)이 온 것이었다. 혈압이 떨어져 승압제를 쓰고 있는데, 환자의 호흡 수가 빨라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의 나이는 88세.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할지, 아니면 항생제에 의지하며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
“환자 보호자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나는 간호사에게 보호자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보호자와 상의해서 치료 여부를 결정할 요량이었다. 담당 간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선생님… 보호자가 없어요.” “보호자가 없다니요? 친척들도 없어요?” “선생님 여기 계신 환자 분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어요. 있어도 버림 받은 지 오래되어 연락이 안 돼요.”
내가 맡고 있는 국립 소록도 병원의 환자들은 가족이 거의 없다. 있더라도 이미 30~40년 전에 소식이 끊겨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한센병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나균(癩菌·Mycobacterium leprae)이 피부와 눈, 손, 발의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을 침범해 생기는 병으로, 우리나라에 1만7000여 명의 환자가 있다.
암환자를 진료하는 혈액종양내과가 전공이어서 그동안 임종을 앞둔 환자를 많이 진료해왔다. 그러다 보니 임종을 앞둔 순간에는 대부분 보호자와 상의해 결정을 내리곤 했다.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보호자가 없는 이 환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를 찾아볼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어렵사리 가족을 찾아내어 연락이 되더라도, 가족 중에 한센병 환자가 있다는 사실로 가정 파탄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센병은 유전과는 관계가 없는데도, 그만큼 일반인들의 편견이 많은 질병이다.
▲ 김범석 국립소록도병원 내과의사
고민 끝에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폐렴이 점점 진행되어 패혈증으로 번졌어요.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돌아가실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전하는 내 입술은 떨렸지만, 그 말을 듣는 환자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제 생각에는 인공호흡기를 달면…” 하고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까지 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거부하였던 할아버지는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죽어서야 천형(天刑)이라는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할아버지를 통해 그동안 얼마나 ‘보호자 편의’ 위주로 진료를 해왔는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환자는 쏙 빼 놓고 병실 밖에서 보호자와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많았다. 그것도 환자 목숨이 달린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나중에 환자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보호자들이라는 ‘진료 편의주의’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들과 대화를 잃어가고 있었다. 환자와 치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진료의 기본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를 볼 때마다 “저를 편안히 죽게 해주세요”라고 외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김범석 국립소록도병원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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