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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모두 존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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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9-08-19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 몸&맘]   삶과 죽음 모두 존귀합니다

인턴으로 근무할 때 응급실을 통해 갓 입원한 83세 행려 환자를 진찰한 적이 있다.

햇병아리 의사인 인턴은 병원 어디서건 찬밥 신세다. 의사들 사이에서 ‘3신’-먹는 데는 ‘걸신’, 잠자는 건 ‘귀신’, 일할 땐 ‘X신’-으로 통한다.

새벽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 끼니를 걸러가며 밤늦도록 수술장이나 병실에서 일하는 인턴의 식사는 늦은 저녁 한 끼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밥을 보면 걸신 들린 듯 먹고,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눈만 붙이면 아무 데서나 잘 잔다. 반면 일 처리는 서투르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다.

병원은 응급 상황이 많은 일터라 선배라도 인턴의 잘못을 “처음엔 누구나 잘하기 힘들다”는 식으로 다독여 줄 여유가 없다.

간호사를 비롯한 다른 의료진 역시 인턴에게 호의적일 리 없으며 환자 중엔 인턴의 존재 자체를 귀찮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인턴은 환자를 진찰할 때 눈치를 본다. 인턴의 질문이나 진찰엔 환자건 보호자건 건성건성 대응하다 몇 분을 못 넘겨 “주치의 선생님은 언제 오세요?”라며 ‘이제 그만하고 나가 달라’는 뜻의 압력성 발언도 한다.

나 역시 그 할아버지를 처음 진찰할 때 혹여라도 귀찮아하실까봐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고 내게 “이렇게 친절하고 꼼꼼하게 물어보는 의사는 처음이야, 고맙수”라는 인사까지 했다.

불행히도 진찰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명치에는 주먹만 한 혹이, 왼쪽 어깨뼈 위엔 사탕만 한 림프절이 만져졌다. 위암 세포가 멀리까지 퍼진 위암 말기였다.

“어떻소?” 진찰을 마친 내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주치의 선생님이 다시 진찰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어요”라며 무심코 “보호자 안 계세요?”라는 말로 화제를 돌렸다.

“가족? 한 번도 있은 적 없어. 길에서 아파서 쓰러져 실려온 거 몰라?” 할아버지의 대답에 민망해진 나는 “편히 쉬세요”라며 돌아섰다. 그때 할아버지는 내 팔을 잡으면서 “내 병 고칠 수 있지? 이제 병원에 입원까지 했으니 더 살 수 있는 거지?”라며 애원 섞인 질문을 했다.

가족 없이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길거리를 떠돌면서 투병했던 83세 할아버지, 통증 때문에 길에 쓰러졌다가 경찰에 의해 실려온 위암 말기 행려 환자. 그래도 그는 힘든 수술을 받은 뒤 더 살고 싶어했다.

나는 그 할아버지를 통해 아무리 비참한 인생을 사는 듯 보이는 사람도 ‘저 사람 못 죽어서 살 거야’란 생각을 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생명은 한없이 존귀하며, 애도를 표하지 않아야 할 죽음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개인적으로도 긴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지인들이 위로차 던진 “힘들게 사느니 돌아가신 게 낫다”란 말 때문에 많이 속상했던 경험이 있다. 어머니의 존재 자체로 행복을 느꼈던 가족의 슬픔을 무시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 이후 의료 현장에선 만에 하나라도 불치병 환자에 대해 생명 경시 현상이 나타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법원에서 어렵사리 인정한 건 말 그대로 ‘존엄사(尊嚴死)’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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